[Critic] 모던단청, 단청에 부는 하늬바람
그러나 너는 창가에 앉아, 저녁이 오면 그 메시지를 꿈꾼다.1
“Du aber sitzt an deinem Fenster und erträumst sie dir, wenn der Abend kommt.”
무우수갤러리의 ‘단청’ 기획 전시가 이번에 제 6회째를 맞았다. 《모던단청》展은 동시대 순수 미술로 재해석되고 있는 한국 현대예술과 공예craft의 접점, 그중에서도 전통 사찰과 왕실 예술의 연결 지점, 그 현대적 재해석을 엿볼 수 있는 전시이다. 첫 번째 전시 《단청丹靑》, 2021.1.20.-2.14 는 개관전으로서 한국 단청화의 선두 주자인 작가들을 초대한 기획전으로 열렸다. 첫번째 단청전을 진행하며, 미술사학자 조은정이 「현대미술과 단청(丹靑)」으로 전통과 현대를 가교하는 담론의 장을 열었다. 2《조선의 만화경, 단청》, 2025.02.05-03.03 또한 단청화로 이름이 알려진 소장 작가들을 초대했고, 주수완은 만다라와 상관되기도 하는 단청의 만화경 caleidoscopic, 광학시각적 optical 인 현대적 조형성에 대해 해제했다.3 앞선 전시에 기초한 2025년 캐나다 토론토에서의 《단청 Dancheong》展에 이어,4 이번 기획전에서는 작가들의 세대가 한번 더 젊은 층으로 내려온다.
이 전시는 탄탄하게 기예를 다져오며 보다 과감한 작업을 하고 있는 청년작가들 위주로 꾸며졌다.
단청은 지붕을 받치는 공간의 안쪽에 표현되는데, 이 공간은 밖과 안의 사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태생부터 목조 건축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지니고 태어났고, 관련된 수많은 건축의 architectonic 어휘들도 오방색의 본뜻 만큼이나 다채롭다. 그렇게 건축의 부속으로 태어난 기능성을 지니면서도, 역사를 담은 그 문양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아름답다. 단청은 왕실 건축과 불화의 탱화 기술이 겹쳐지는 공예이기도 하기에, 그 익힘과 적용에 까다로운 규칙들이 있다. 제작에 앞서 훈습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규칙의 어려움은 충분히 기술을 숙련하였을 때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창작의 역량을 끌어내고 발휘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전시에서는 여실히 보여준다.
모던단청》展은 2026년 현재에, 이어지는 듯 단절되거나 착종되곤 했던 한국 근현대 모더니즘의 꿈을 되살린다. 미술美術이라는 용어가 일본어를 경유해 『매일신보』 지면에 최초로 나타나기 이전, 여전히 도화서 출신의 화사畫師들이 활동하며 근대로의 길을 닦던 시기, 그림은 여전히 서화書畫 골동취미로 불리고 그림과 공예가 구분되지 않던 시기의 어렴풋한 꿈. 한편으로, 우리와 전혀 다른 모던화의 길을 걸었던 유럽의 모던에서, 이를테면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와 블룸즈버리 Blumsbury 그룹에 의해 표상되던, 예술과 수공예 운동의 순수하게 빛나는 꿈.
단청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그 건축적 기능과 색채적 조형성에 주목해왔듯이, 단청의 화려한 색채는 다감하게 다가오면서, 전통과 현재가 가장 쉽고도 다감하게 연계되는 지점이다. 무우수갤러리는 앞으로도 단청 기획전을 지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승의 길은 작가들이 제안하듯 전통을 고립시킨 채 화석화시키는 것이 아닌, 건축의 부속 요소로부터 해방시켜 동시대적 현재적 삶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일일 것이다. 마치 K-팝처럼 말이다. 단청은 왕실에 얽매인 제도 미술과 불교적 세계관을 잇는 독특성을 지닌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와 대조되게,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 기인하여 불교는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500년 가까이 여성과 민중들의 종교로 남았다. 불교적 세계관과 삶의 태도는 복잡화된 동시대적 현대에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인의 성정의 가장 좋은 면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불교적 세계관 또한 단청을 매개로 현대적으로 새로이 재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이번 전시는 청년 작가들의 단청 해석들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각기 한국뿐 아니라 영국, 미국, 독일 등 해외에서 오랫동안 수학하고 활동해왔다. 이들은 예술가인 동시에 무형문화재에 가까운, 전통 공예 기술을 계승하는 위치에 있으며,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연계하는 독특한 작업을 하고 있다.
김도영은 전통적으로 건축에 얽매이던 단청을 그 속박되고 묶인 자리로부터 풀어낸다. 단청은 본래 무지개와 같은 빛의 요소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러한 문양들은 건축물로부터 해방되어 굽이치고 흐르는 오색의 띠가 된다. 김도영의 띠는 고정된 장소로부터 풀려난 어떤 흐름의 결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추상적 이념으로 고양되고 순수한 감각질로 정제된 빛의 요소로서 무지개는 아니다. 전통 단청 휘문暉文의 보색적 역동의 오방색청, 적, 황, 백, 흑에 기반하지만, 또한 그것을 벗어난다. 그보다는 그 색의 띠들은 점액처럼 어디까지나 물질의 혼탁함을 담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물질로부터 생명 현상이 일어나는 임계 영역을 사유한 듯 하다. 혹은 그 경계적 정경은 형언할 수 없이 타오르는 심상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청에서 비롯된 그의 그림은 어떤 현상적 발생을 머금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기이한 끌개strange attractor’를 담고 있는 듯 하다. 혹은 그러한 도저한 잠재력을 표현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무아 강은 단청이 지닌 색채 에너지와 리듬에 집중한다. 그는 분채 안료가 나무라는 지지체에 스며들어 하나된 상태를 자연스럽고도 절묘하게 다뤄낸다. 보색과 그 벡터를 활용하는 단청의 오방색은 화사하게 발색된 미감으로 인해 거의 색동처럼 보이기도 하며, 건축으로부터 풀려난 그 색채들은 현대적인 모습의 탁자나 쟁반 같은 실물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가을Autumn><일몰Sunset>과 같은, 그가 체험한 구체적 풍경으로부터 정동을 추출해 낸 본격적 추상화가 되기도 한다. 유동적이고 왜상적인anamorphic 색의 흐름은 많은 연상을 자아낸다. 한편 관람자들은 화사하고 투명한 색채 너머 그 색채를 붙드는 나무라는 단단한 지지체material support의 굳건한 견실함에 직면하게 된다. 무아 강의 이러한 시도는 일체의 아날로그적 이미지들이 디지털화로 인해 관습적인 그 물적 지지체를 상실해 온 현재의 상황에, 여전히 건재하며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에 대해 발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에술을 ‘코리안 아르 누보Korean Art Nouveau’로 명명하며, 19세기 유럽 아르 누보가 지녔던 생명력의 약동과 일상의 미화를 한국의 자연관과 색채 감각, 현대적 존재론을 거쳐 재해석하고자 한다.
황체상은 단청의 머리초를 비롯한, 전통적 미감을 형성해온 요소들이 아무리 옛 원본 그대로 복원되었더라도, 그 안의 전통이 이미 무너지고 황폐화된 그래서 어떤 보충을 요구하는 상태임에 주목한다. 그는 단청의 형태에서 친숙하고 단단한 듯 보이던 것들이 실제로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변화의 순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안다. 지붕을 받치던 구조인 단청의 머리초는 본래 전통적 질서의 가장 안정된 조형미를 상징하는 것이지만, 그는 그 형태가 더 이상 고정되지 않음을 보이며, 그것을 다만 붕괴가 아니라 껍질을 벗고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그는 빙하가 서서히 녹아내리듯 급격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변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목본채색의 <탈피>에서 황체상은 머리초의 형태를 퍼즐 조각으로 분해하여, 완성되지 않은 상태 그자체에 주목한다. 퍼즐은 완성되기 전까지 흩어진 조각들로 존재하며,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불완전한 상태이다. 작가는 그러한 상태는 그대로 우리들의 삶과 닮았다고 말하고자 한다.
“무너진 틈 사이로 드러나는 금빛의 흔적은 상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간과 시행착오, 반복된 노력의 축적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순간에도 남아 있는 이 빛은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이며, 불완전한 상태 속에서도 지속되는 희망의 증거이다. 깊은 청색의 배경은 사라짐과 생성, 상처와 치유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변화의 양면성을 담아낸다.”, 황체상 작가노트
황체상이 깨진 머리와 같은 형상의 무너진 틈의 공간을 금빛의 흔적으로 지칭하고, 이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복원 기법의 견지에서 의미가 있다. 과거에 부서진 도자기는 그 파편을 귀한 금물로 메워 복원하기도 했고, 세밀하게 채색하여 화려하게 장엄하는 금단청, 갖은 금단청은 단청 가운데서도 가장 상위의 품에 속했다. 금빛의 사용은 조선 후기 쉬임없이 이어지던 전란이 잠시나마 종식된 시기 중국, 일본과 교역이 증대하였고 훼손된 유물 또한 정성스럽게 복원했던 기록과 상관이 있다.
이인승과 정하율 또한 금빛을 사용하는데, 마치 금실로 그려내듯 유려한 선묘가 돋보이는 공필화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다른 단청 그림들이 호소력있는 무지개빛 휘 모티프를 즐겨 채택하는데 비해 이들의 화면은 색채가 바탕의 검은 빛과 선묘의 금빛으로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특성이 있고 용, 십장생 등을 묘사하는 별화적 표현에 집중한다. 섬세한 공필 선묘 표현은 고대 삼국시대부터의 귀족문화적 전통이라는 오랜 뿌리를 지닌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러한 공필화의 금빛을 고려 시대의 경전 필사, 금물을 찍어 그린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라든지 그러한 변상도의 형식을 채택하였던 조선 인조 때 이징李澄, 1581~의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에서 보았던 바 있다.
변상도와 이금산수도의 검은 바탕은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는 속세의 흑암, 외침에 시달리던 당대의 시대적 어둠을 문자그대로 드러낸다. 그 가운데 여전한 금빛의 선묘는 어둠이 지우거나 덮을 수 없는 가냘프지만 유려한 화엄의 진리와 생의 약동을 전달한다.
검은 바탕의 별화인 이인승의 수묵화는 <용 만들기 시리즈><작고 소중한 것><천둥 번개>라는 제목으로, 독특한 드로잉 필력을 보여준다. 그는 <용 만들기 시리즈>에서 둥그렇게 피어난 구름같은 운문들이 저절로 군집하며 용의 비늘들이 모여 마치 그 자체를 그려나가듯 하는 매우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관습적인 용의 형태라기 보다는 그가 그리는 용 만들기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메타적 묘사이기도 하다. 그는 구름처럼 피어나고 또아리진 비늘들 사이 어떤 섬광같은 폭발 내지 피어남의 감각을 엿보게 한다. <작고 소중한 것><천둥 번개>에서는 문인화나 목판화처럼 오로지 강조해야 할 부분을 간일하고 정확하게 포착하는 일필휘지의 필력을 보인다.
정하율은 본래 건축에서 태어난,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그려지던 단청의 이미지를 비단 위로 옮겨 공필화의 섬세한 감각을 되살리고자 한다. 그는 단청이 지니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원본이 유실된 후 기억에 의지해 그린 복제본들만 남아 있는, 당나라 오도자 같은 오묘한 선묘 위주의 공필화로 표현하고 있다. 혹은 탱화로부터 온 그러한 유려한 기술로 그는 서사성을 지닌 관세음보살과 같은 인물이라든지 신화적이며 길한 동물인 용의 이미지를 합성하고 금의 물성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작업한다. 정하율은 전통적이면서 복잡한 서사적 소재를 정성껏 그리기 때문에 그의 작업에서도 단청의 한 기능이었던 장엄의 품위가 묻어난다. 그러나 그는 전통 회화의 장엄보다는 섬세한 밀도와 시각적 여운에 집중하려 했다고 한다. 무지개 띠와 화사하게 피어난 연꽃 가운데 미소짓는 관세음보살은 동시대적 현재에 재해석된 미인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양의 추상과 어우러짐은 환상적인 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지원은 단청의 장지문 문양 장식 즉 이슬람권에서도 사용되곤 하던 기하학에 기반한 사방연속무늬 테셀레이션 방식을 재현한다. 정삼각형,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등은 고찰이나 궁궐에서도 그러했듯 그 현대적 해석 속에서도 그 추상적 패턴의 미감으로 강력한 호소력을 얻는다. 정삼각형으로 형태지워진 종이 바탕에 실크스크린된 <프랙탈Fractal>연작은 기하학적 문양 자체는 대단히 엄격하게 조합되어 있되 옅고 짙은 분홍과 또한 옅은 연보라, 가지색, 화이트와 블랙의 사용과 서로 얽힌 하트 문양으로 동시대적이고 K-팝적인 감각마저 표현한다. 매듭처럼 얽힌 하트의 패턴 처리는 전통을 변용한 새로운 면모로서, 근대 이전까지 한반도에 하트 문양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구한말 개화기에 이르러서야 서양 문물과 함께 비로소 하트가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때문에 하트는 한국인에게 있어 서쪽에서 불어오는 하늬 바람, 모더니티의 도래를 나타내는 기호이기도 했다.
조민경은 판화와 회화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으로 장르의 어법에 도전한다. 스크린 프린트 이미지에 상징을 더하며, 전통적 불교 도상에 동시대 불교의 상징을 입체적으로 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불두만을 반복적으로 크게 동판화 기법으로 제작한 <공화> 연작은 아무래도 잔상afterimage으로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실크스크린 <마릴린 먼로Marylin Monroe>를 연상시킨다. 한편 그가 채택한 불두는 고대로부터 지난 천오백년간 한국인의 모습이 된 불상이라기보다는 본래 부처의 형상을 만들지 않던 불교에서 최초로 불상의 형태를 조성하기 시작하던 시기 성립된 양식인 헬레니즘적 터치의 간다라 불상이다. 때문에 그의 단청 불상은 대단히 친숙하면서도 이국적이고 외래적인 요소를 간직한다. 그러한 처리는 단순히 도상적 선택을 넘어 불교적 정신과 불심이 자취를 감추고 모든 것이 상품화된 이 시대의 핵심을 찌르는 논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상대적으로 제작이 쉽고 부드러운 실크스크린이 아닌, 깎고 부식하는 등 강하게 저항하는 물성을 다스려야 하는 동판에 그린 원판을 회화로 제시하는 것 또한 매체에 대한 재해석이면서 강한 느낌을 부여한다.
박장배는 초상화뿐 아니라 환생reincarnation 주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독립기념관의 김동삼, 조완구, 홍진 초상화를 제작하였고, 전통초상화법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展을 제작하기도 했다. 삶도 죽음도 아닌 듯한 낮과 밤의 어스름한 경계에서 실상을 보는 그는 심상의 그림자로서 한점 한점의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단청의 재해석에 있어서도 불교의 연기론적 입장을 취한다. 실이 모여 고운 비단을 이루듯, 생각들이 모인 우리들자신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다. 이번 전시의 <어스름꽃> 연작은 현대미술에서 이따금 다뤄지곤 하는 시안화타입Cyanotype의 푸른 청사진을 연상시킨다. 시안화타입의 식물학 표본이나 건축 도면 청사진은 본래 오브제와 접촉된 면은 하얗게, 빛이 직접 닿은 면은 푸른 네거티브로 찍힌다. 반면 그의 <어스름꽃>들은 부정의 부정, 네거티브의 네거티브 형식이다. 민화의 모란이나 접시꽃을 상기시키는 고요한 푸른 형상들은 비단에 채색된 것이지만 전통 한지문에 떠오른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백같은 텅 빈 마음 속, 사물과의 대면이 만드는 구멍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아라는 영광 불갑사 대웅전의 <삼태극넝쿨문양三太極忍冬紋>을 모티프로 삼았다. 그의 <우주Cosmos>연작은 하늘·땅·사람이라는 세 근원三元에 대한 시각적 사유를 표현한다.5 그는 이 삼원으로 이뤄진 세계를 완결된 상징이라기보다 서로 스며들면서 확장되는 관계의 흐름으로 풀어낸다. 그의 도해적 회화는 단청의 일부를 ‘배경의 절단과 분리’ 하고 변형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은 문양의 상징을 애초에 속해 있던 건축적 요소로부터 해방시켜 외부 공간에 대한 하나의 공간적 개입으로서 작동하게 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그러한 시도가 작품이 놓인 외부 장소의 공기와 빛을 그림 화면 안으로 끌어들여, 그 자신이 그러했듯 관람자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마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을 기원한다.
사실 작가의 의도를 듣지 않고서 <우주>에서 그와 같은 심원한 뜻을 읽기는 어렵다. 그러나 네 귀퉁이를 사각의 모퉁이로 끌어당기는 검은 하트의 벡터는 분명히 그가 말하듯 경계를 허문 공간의 방향지워진 확장성을 시사한다. 네 방향의 표시는 하트의 첨가 만큼이나 기본적이면서도 서구적 요소로 보이기도 하는데, 서양 중세에서 세속을 뜻하는 4의 수비학 또는 객체지향존재론의 현대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의 ‘쿼드러플 오브젝트Quadruple Object’를 연상시키는 면조차 있기 때문이다. 삼원이라는 동양철학으로 세계의 원리를 도해하기를 시도하는 남아라의 코스몰로지Cosmology 혹은 코스모그라피Cosmography가 앞으로 좀 더 자유로이 확장되길 기대한다.
홍보라는 국가기능장인이다. 그는 불교의 사사무애법계, 각 현상마다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고 끝없이 이어진다는 화엄사상을 숙지하며 단청의 머리초 작업을 한다. 연기론으로 말해지기도 하는 이와 같은 화엄의 사상은 인간이 아닌 사물, 미미한 것, 혹은 생명없는 불활성의 것으로 간주되는 비인간적 행위자non-human actor들의 네트웍을 존중, 고려하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웍이론ANT에도 닿아 있다. 작은 단위의 문양을 점묘법처럼 작업하는 그는 사령용, 봉황, 기린, 거북, 십장생도 같은, 주제가 있는 단청을 현대적 어법으로 옮긴다.
고택의 빗살무늬 문의 문양을 옮긴 <잇다거북, 겹고리, 대소슬..>연작은 이슬람 미술의 평면덮기 테셀레이션Tesselation 장식패턴 혹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성형캔버스Shaped Canvas를 연상시키며, 그자체 색채적 추상화이자 오브제로서 제시되고 있다. 원형 안에 작은 문양들이 들어찬 <점, 경이로운 세계 Pointure, Wonderland>연작은 ‘진정한 나의 표현’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그러한 모색은 ‘심우도尋牛圖; 十牛圖’ 도상의 추구에 연원한다. 결과는 경쾌한 콜라주적 조형이다. 자기 성찰적 수행과 제작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이번 모던단청전에 작품을 내건 모든 작가들에게 공통된 요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작품의 주제인 점은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진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그리는가를 고민하다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나선 여정에서 결국 어떤 진리를 찾게 된다는 심우도를 모티프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심우도에서의 소는 내가 찾고자 하는 목표이자 내가 계속 생각해야 하고, 알게 된다면 내 것으로 만들고 또 그것을 지켜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선 잃어버린 소를 찾아 한 발짝 나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발자국들이 모여 나를 찾거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방향이든 우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다양한 색의 무수한 점들을 화면에 담았다. 그리고 그 걸음의 방향을 제한하고 싶지 않아서 화면을 원형으로,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되도록 작업하였다. 이후 여러 문양과 형태, 색들을 다른 의미의 점들로 인식하고 표현하게 되었고, 화면의 형태에도 얽매이지 않기 위해 여러 형태의 화면과 구성으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홍보라 작가 노트
이번 《모던단청》展에 청년작가들이 내건 작업들에는 팝아트적 느낌이 물씬 묻어난다. 금빛과 유려한 형상의 사용과 구성은 최근 젊은 작가들의 경향인 ‘플랫flatness’의 지향, 무지개 띠 휘문暉文 조형의 상징성과 함께 경쾌함이 한껏 드러난다. 사족 하나. 나는 작품들을 보면서 다소 구닥다리처럼 느껴질 수 있는 헤겔적 시각을 상기하기도 했다. 19세기의 서구 철학자 헤겔은 절대정신의 정신현상학의 관점에서 인류사의 사상적, 사회체제의 발전과 예술작품의 조형양식의 변천을 함께 사고하려 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선 지나치게 관념적인 것이지만, 일관되게 사상과 예술 사회를 설명하려는 그러한 시도 자체는 어떤 울림을 주는 면이 있다. 헤겔은 모든 예술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같은 건축물로부터 나왔다고 보았고, 고대건축은 그러한 전제군주정의 현현이었다. 즉 건축은 동양의 전제군주정에 상당하는 양식이었는데, 헤겔당시 19세기 서구 회화의 기독교적, 낭만주의적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중간에, 애초에 건축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던 조형이 조각으로서 독립해가는 그러한 시기를 상정했다.
조각은 한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죽음에 다름아닌, 경계의 초석 아래Sublime의 본래의 뜻, 그러한 경계의 혹은 애도의 표시로부터 태어난다. 헤겔식의 설명은 오늘날 아나크로니스틱한 것일 터이다. 또한 단청이 현재에 단단히 발딛기 위해서는 팝아트, K-팝적 해석도 충분히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 나로서는 건축적 요소로부터 해방되는 그 변신의 과정에 어떤 조각적 요소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물론 전통 문에서 투각 문양이 그 역할을 했듯 형태지워진 화면을 통해 그러한 시도를 했던 작가들도 있었다. 여하튼 이번 전시의 작가들에게 그 모든 조형적 시도는 동시에 전통적 수기修己이자 불이법문不二法門라 할 수 있는 불심의 일상 속 실천이기도 했다. 이번 《모던단청》展은 그러한 기특한 청년 작가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모색의 여정에서 가려 뽑은 백미라 할 수 있다.
최 정 은 미술사학자
-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단편 「중국의 만리장성 건설에 관하여」(1952)에서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황제의 밀사Eine kaiserliche Botschaft」(1919)를 인용한다. 죽어가는 황제는 한 밀사에게 메시지를 맡긴다. 밀사는 즉시 출발하지만, 황궁은 끝없이 넓고 군중은 빽빽하여 아무리 달려도 그는 미로에 갇힌 상태이다. 궁지에 처할 때마다, 막힌 곳마다 그는 오로지 가슴을 가리켜 보인다. 인용은 그 단편의 마지막 문장이다. ↩︎
- 「단청전을 기획하며」, 《단청丹靑》, p.1; 조은정, 「현대미술과 단청(丹靑)」, 《단청丹靑》 (무우수갤러리, 2021.1.20.-2.14), pp.2-5. 초대작가는 문활람, 최문정, 이양선, 노재학, 황두현, 최경준 등이다. ↩︎
- 주수완, 「조선의 만화경, 단청」, 《조선의 만화경, 단청》 (무우수갤러리, 2025.02.05.-03.03). 참여작가는 박일선, 빠키, 안유진, 양상훈, 양해웅, 이영희, 이채오, 정선희, 조혜영, 황대곤, 황두현 등이다. ↩︎
- 《단청 Dancheong》展 (캐나다 토론토, 2025.06.02.-06.15). 서문은 주수완이 집필하였다. 참여작가는 김선용, 문활람, 박일선, 서칠교, 이돈아, 이영희, 이재윤, 이채오, 조혜영, 빠키, 황두현, 황대곤 등이다. ↩︎
- 세 근원(三元)에 대한 생각은 전적으로 동양철학적인-혹은 동아시아적인-것이다. 이를테면 서양에서 모더니티로의 기로에 있었던 데카르트주의의 경우 실체이원론 즉 사유실체(res cogitans)와 연장실체(res extensa)를 구분해서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였지만, 동시대적 현재에 있어서는 17세기에 이미 ‘신즉자연(神卽自然)’을 주장했던 실체일원론의 스피노자적 사유 쪽이 보다 수용되고 있다. ↩︎
